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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언제부터 '왜 소금에 인연을 맺게 되었나'를 살펴보면 인류와 소금과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수렵 위주의 생활을 하던 시기에 인류는 고기를 통해 염분(특히 나트륨)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 염분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식습관이 고기에서 탄수화물 위주로 바뀌면서 염분을 따로 섭취해야 했습니다. 식물성 식품에도 염분이 일부 들어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생리작용을 원활히 해 줄 정도로 충분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금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농경생활은 인구밀도를 높였지만 밀집생활에 따라 질병의 발병 또한 쉬워졌습니다. 소금은 질병에 취약해진 인류에게 치료목적으로도 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소금은 인류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소금은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색황금으로 불릴 정도로 귀하였고, 돈으로 통용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봉급생활자를 의미하는 샐러리맨이라는 말 속에 임금(賃金)을 샐러리, 즉 소금으로 받아가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제도는 로마시대 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소금을 생산하였을까요? 기록에는 삼국사기》권17〈고구려본기〉미천왕조에는 왕이 즉위하기 전엔 왕손의 신분을 감추고 피신하며 소금장사를 하며 화를 면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삼국유사》에는 소금을 시주하였다는 기록도 있구요.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며, 서천왕(고구려 제13대 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의 아들이다. 큰아버지인 봉상왕 (고구려 제14대 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동생 돌고를 역모자로 몰아 죽이자 을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내야 했다. 처음에 을불은 수실촌의 부호인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을불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밤낮으로 심하게 일을 시켰다. 어떤 때는 연못의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새도록 연못에 돌을 던지게 해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낸 을불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집에서 나와 동촌으로 가 그곳에서 소금장수 재모를 만나 함께 소금을 팔러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을불은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서 한 노파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해 소금 한 말을 주자, 노파는 더 달라고 했다. 을불은 한 말이면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해 더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는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몰래 을불의 소금짐 속에 넣어 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을불이 소금짐을 지고 그 집을 나서자, 노파가 뒤쫓아와 자기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태수에게 고소했다. 태수는 을불에게 절도죄를 물어 태형을 가하고 소금자루는 빼앗아 노파에게 주었다. 이처럼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중 봉상왕의 폭정이 더욱 심해지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는 무도한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조불과 소우를 몰래 보내 을불을 찾게 했다. 비류강가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와 만나게 했다. 남몰래 을불을 받들던 창조리는 그 해(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으로 사냥을 떠나자 사냥터에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은 모두 나를 따라 하라."고 말하며 갈대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가 그렇게 했다. 봉상왕을 폐한 창조리는 을불을 즉위시켰으며, 왕위에 오른 을불은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331년 2월 을불이 세상을 떠나자 미천원(美川原)에 장사지내고 미천왕이라 했다.

고려 충선왕때는 제염을 관장하는 기관을 도염원을 두고 엄격한 관리 아래 소금을 생산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에 관리들의 감독 아래 비교적 자유롭게 소금을 제조하였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제는 1907년 염업에 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시작해 1911년 조사를 완료했습니다.